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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회생 신청자격 진술서 작성

개인회생 신청자격 진술서 작성

 

 

 

 

 

 

 

 

 

 

 

 

 

 

 

 

 

 

 

 

 

 

 

 

 

 

 

 

 

 

 

 

 

 

 

 

 

 

 

 

 

 

 

 

 

 

 

 

[법률정보] - 개인회생 진술서 견본 작성이 어려우시다면

 

개인회생 진술서 견본 작성이 어려우시다면

개인회생 진술서 견본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들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 [분류 전체보기] - 비욘세는 확실히 라이브 공연에 여왕입니다 [분류 전체보기] - 구별할 수 없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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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회생 진술서 눈물을 흘리며

개인회생 진술서 눈물을 흘리며 해당 진술서는 개인회생 실제 제출된 사연 입니다. 저는 19**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저는 대전에 있는 여고를 졸업한 후 바로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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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을 갚고 싶으나 현재는 한쪽 눈이 실명이 된 상태라서 어쩔 수 없이 파산을

저는 올해 62세인 000라고 합니다.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 보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금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여 잠시 떠올려 봅니다.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졸업을 하였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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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회생 신청자격 진술서 작성 후!

평범한 가정의 2녀 중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99년경 당시 사회는 IMF 여파로 많이들 힘들어하였는데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주택사업도 힘들어지더니 결국 부도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아버님은 채권단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어 그때부터 현재까지 1년 에 한 번 정도 전화만 할 뿐 집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 살림은 어머님과 장녀인 제가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은 졸업해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며 제게 학업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고 저도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제 학비는 제가 벌어서 다닐 생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을 가정주부로 있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안되었고 기껏해야 남의 집 식당의 허드레 일이나 파출부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던 2000년도경 어머님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숯불갈비라는 고깃집을 차리게 되었고 저와 동생은 하교 교 후 어머니 식당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가게의 매상은 저조했고 그런 와중에 어머님이 제게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면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제게 신용카드를 발급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가지고 있던 국민카드를 어머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어머니는 제게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달라고 하였고 저는 그런 어머님이 안쓰러워 어머님이 요구하는 사항을 최대한 들어 드리고 싶어서 국민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어머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가게는 1년 만에 폐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대학을 졸업하여 회사에 계약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도 회사에 취업을 하였고 앞으로는 걱정이 없을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어머니는 제게 신용카드를 더 만들어 달라고 하였고 저는 어머니를 위해 우리은행 카드와 삼성카드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러던 2001년 10월경 어머님이 서울에 빌라를 한 채 사려고 하는데 제 명의로 사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까지도 어머니가 빚을 잘 갚아나가고 돈도 조금 모아서 빌라를 사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어머니는 회사를 나가려 하지 않았고 이유를 들어보니 어머니는 1년 동안 다단계 회사에 빠져서 거기다가 제 카드와 어머니의 대출을 쏟아부었는데 다단계라는 회사의 실상이 언론매체를 통해 전파되면서 어머니는 허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으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을 살 때 신한은행에서 생각지도 않은 엄청난 금액의 대출로 인해 신한은행의 대출 이자 갚기도 버거운 상황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2004년도에 신용회복을 신청하여 매달 29만 원씩 갚아 나갔습니다. 그러나 2005년 말경부터 도저히 신한은행의 대출금 이자까지 갚기가 버거워 신한은행의 대출금이 연체가 되었고 결국 2006년도에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신용회복위원회 승인통보서, 경매된 집 등기부등본 및 배당표 첨부)

집이 경매로 넘어가도 어떻게든 개인회생 신청자격 전에 벌써 신용회복위원회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3년 정도를 정말 열심히 부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2년을 더 부어야 하고 보증채무는 신용회복을 신청할 당시 포함이 되지 않아 어머님의 보증채무인 삼성카드는 별도로 갚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빚 갚는데만 신경을 써서 살다보니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항상 뭔가에 쫓기는 기분과 불안한 감정뿐이었습니다. 그래서 2007년 4월에 솔빛 정신과의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은 결과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고 병원에서는 몇 개월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신용회복에 불입해야 하는 불입액이 연체가 되었고 개인회생 신청자격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우울증에서 많이 벗어나 일반적인 사람처럼 행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러다보니 직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기껏해야 아는 사람 가게에서 조금씩 도와주면서 살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1억 원에 가까운 빚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개인회생 신청자격을 알아보고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남들처럼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였고 신용카드도 만들어서 제 월급의 범위 안에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된 이유는 예전에 간경화로 몸이 안 좋으신 아버지가 2003년 서울대학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으면서부터입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던 저희 가정에서는 보험을 한 개도 안 들어놓았고 그 탓에 항암치료, 및 각종 병원비를 저와 오빠가 버는 돈으로 충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문턱도 안 나온 저와 오빠가 버는 돈으로는 도저히 병원비 충당이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오빠는 자기가 버는 돈으로 어떻게든 아버님 병원비를 충당할 테니 저는 저희 가족의 생활비만 충당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빠나 저나 월급으로 병원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오빠는 카드를 만들어서 부족한 병원비를 충당하였고 저 역시 제가 버는 돈으로 저희 4 식구 생계유지가 힘들어 그때부터 조금씩 카드 빚이 쌓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빠의 병만 완치가 된다면 이런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버텼으나 2004년 11월 아버지는 1년 넘는 투병생활을 끝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저희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 생전의 빚과 아버지 병원비와 생활비를 위해 사용한 제 카드 빚과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씩 빌려 쓴 빚 등 빚 밖에 남은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일해서 빚 갚을 생각을 하였으나 그 시기에 남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지우려고 하였으나 남편의 완강한 반대로 혼인신고만 한 채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개인회생 신청자격 방법밖엔 없다는 걸 그 시기 남편도 셋째형과 중국집을 운영하다가 경영이 어려워져 중국집을 폐업하고 일용직 막일 일을 하고 있었고 저는 저대로 아이를 임신하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을 하였는데 그때 남편에게도 빚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와 남편은 비슷한 시기에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달게 되었습니다. 저희 형편도 어렵지만 시댁도 형편이 어려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빚 독촉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이를 출산 후 예전에 일했던 시장에 나가서 일도 하였으나 남편의 돈벌이가 신통치 않아 빚은 계속해서 쌓이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으나 2009년에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5월에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지금은 집에서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빠듯하게 생활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도 신용불량자이고 저도 신용불량자인데 이제 글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는 큰 딸아이가 웃으면서 또 채무 독촉장이 왔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이런 제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원망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고 제 가슴만 아플 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남편이 개인파산을 하면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고 하여 이번에 남편과 함께 개인회생 신청자격이 되어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1991년 고등학교 졸업 후 세공 일을 하게 되었고 1년 정도 근무 후 1992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노조 사무실에서 경리로 1년 정도 근무를 하다 친구에 소개로 남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995년 둘 다 경제적 능력이 되질 않아 결혼식은 못 올리고 혼인 신고만 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둘이 벌어서 집도 얻고 결혼식도 올리면 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사람이 좋은데 결혼식이 무슨 대수냐 하는 생각에 살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생각과 달리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만 마시고 늦게 들어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1996년 3월 첫아이가 태어났고 그전까지는 일도 안 하던 남편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일자리를 알아보고 용역업체에 나가 막노동 일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철없는 남편으로 생각을 하고 괜히 결혼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후회하며 살았지만 아이를 위해 그래도 변하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1997년 IMF 경제 위기를 맞으면서 그나마 다니던 용역 업체 일마저 다니지 못하게 되었고 남편은 또다시 일자리 알아보고 다니면서 친구들을 만나 매일 술로 지내게 되었고 그때부터 술만 마시면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도 안 구해지고 집안에 생활도 어려워지고 하니 남편이 더 힘든가 보다 생각을 하면서 참고 아이를 키웠습니다.

인천에서는 남편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매일 술과 폭력을 행하여 경찰서도 몇 번 다녀오고 사람이 이상해지는 생각에 친구들을 못 만나게 하기 위해 대전으로 오게 되었고 형님이 시공업체를 다니고 계셔서 형님을 따라 일을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은 일을 다니려면 차가 필요하다면서 엘지카드사에서 보증인을 세우고 차를 구입하자 하여 남편이 보증을 서고 16.000.000원을 받아 차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식당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일하는 곳은 고정적인 월급이 아닌 일당으로 받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생활비와 카드 이자 내기가 어려워져 2001년도에 삼성생명에서 대출을 받아 생활비 및 채무변제를 하기 위해 또다시 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엘지카드 및 삼성생명 대출 채무 2001년 2.292.253 2002년 4월 2.291.121 5월 1.500.000 국민카드 3.600.000 1.428.330 2.250.000 500.000) 생활고에 힘들어지자 남편은 또 일을 안 하기 시작하였고 일을 다니면서 친해진 사람들과 매일 술을 먹고 들어오고 또다시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남편 경찰서에 와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친구들이 술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폭력을 행하여 경찰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예전에 폭행 전과로 인해 또 한 번 교도소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미워도 남편이라는 생각에 합의금을 마련해 보려 했지만 액수도 너무 많고 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였고 남편은 교도소에 수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인천에 살 때도 폭력전과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런 상황들을 글로 쓸라 하니 정리가 잘 되지도 않고 최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진실하게 작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믿고 살 수가 없어 이혼을 해달고 했지만 안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아이 생각하며 참고 살아왔던 저에 지난날에 생활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에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2003년도  도망을 오게 되었고 빚을 갚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식당 설거지부터 아파트 계단청소 공사현장 못 줍는 일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빨리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무리한 채무를 지게 되어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이자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채무를 지게 되어 여자 혼자 몸으로 그 빚을 갚아 나아가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도 여러 번 들었으나 아이가 자꾸 눈에 밟히고 아직 부모에 품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야 하는 아이를 생각하니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용기를 내서 살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2005년도 학창시절에 알고 지내던 선배 언니가 살고 있는 고향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방 1칸 얻을 형편이 안 되는 저에 사정을 알고 당분간은 자기네 집에서 지내라고 하여 선배 언니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어느 곳 역시 신용불량자로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기에 일용직으로 식당 주방 일을 하게 되었고 주방 일을 하면서 채무 변제를 조금씩 하면서 하나뿐이 딸아이에 교육비도 조금씩 보내주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빨리 딸을 데려 오고  싶은 마음만 조급해 왔습니다. 마음대로 되지는 않고 너무도 막막했습니다. 낮에는 식당일에 저녁에 퇴근해서 오면 부업으로 휴대폰 케이스를 끼우는 일도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식당 주방 일을 하다가 주방에 넘어져 허리를 다쳐 힘든 일은 못하게 되었고, 2009년 2월 언니가 보증금을 빌려줘서 보증금 300백 월 31만 원 월세방을 구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허리에 무리가 되는 일은 못하고 있는지라 선배 언니가 차린 옷가게서 월 60만 원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2월 달에 집을 들어왔지만 지금은 보증금도 월세로 다 충당되어 보증금도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버는 돈으로는 1억이 넘는 빚을 감당 할 수 없어 개인회생 신청자격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채무에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금융권에 도움으로 지탱을 해왔지만 부채를 변제하지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 동안 제가 살아온 과정입니다. 어떤 이유로 제가 감당하기 힘든 채무를 지게 되었는지 제가 기억나는 대로 솔직한 심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다면 깨끗이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하여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제 딸아이와 같이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부디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도록 관대한 선처를 부탁며 개인회생 신청자격 절차에 부디 부탁드립니다.

  먼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하여 채권사들 과 주위 분들에게 죄송한 심정으로 사죄드리면서 채무 증대 및 지급 불능 경위에 대한 글을 써 올리겠습니다. 만일 추후에 거짓이 발생할 경우 개인회생 신청자격이 기각되어 그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을 것을 맹세합니다. 제가 파산신청을 하게 된 이유는 남편이 여러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게 되면서 사채업자와 은행. 카드대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당시 자신의 아버지 연탄보일러 제작소에서 근무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회사 경리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회사에서 소리 없이 데이트를 하게 되었으나 남편의 아버님 반대가 너무나 심해 결국 남편은 저를 선택하고 아버님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그때부터 동거생활을 하게 되었고 남편은 지인의 소개로 배합사료 기계 제작업체에 근무하게 되었고 저는 화장품 판매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97년 첫아이를 출산하면서 저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남편 혼자 가정을 위해 일을 하였지만 당시 월급 70만 원으로는 저희 가족이 살기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결혼식은 꿈도 꾸지 못했고 남편은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갔습니다. 당시 월급으로 생활하기 어렵던 남편은 어느 날 당분간이라도 생활비 때문에 그러니 대출을 받아야 한다며 대출 전단지에 전화상담을 받았습니다. 총 400백만 원에 선이자 80만 원을 떼고 320만 원 이자 30%의 조건으로 대출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첫아이를 출산하고 병원비도 없어 원장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한 달 후 갚는다는 조건으로 퇴원을 했었습니다. 당장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월세도 밀린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비싼 조건으로 대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알게 된 사실은 남편이 신용으로 대출을 받은 게 아니고 대출업자는 남편 명의로 중고차를 구입하여 그걸 되팔아 대출이 되었던 겁니다. 
더욱이 남편은 엎친데 덮친다고 다니던 회사의 계약기간이 만료가 되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사정사정 부탁을 했지만 이자를 못내는 날이면 어김없이 회사로 찾아와 독촉을 하기에 회사에서도 곱게 보질 않았습니다.
2000년 남편은  일용직을 하게 되었고 저는 집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부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사업을 준비 중이라며 거창하게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천만 원을 자신에게 투자하면 두 달 후 원금에서 500백만 원 정도를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며 자신이 운영하는 사무실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남편은 사람과 사무실에서 잡다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천만 원을 어떻게 해서든 빌려 두 달 동안 이자만 잘 내면 어느 정도 생활에 도움이 될 거 같다며 또다시 대출 전단지를 들고 왔습니다. 남편은 상담을 하였고 대출업자는  대부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천만 원정도 단기일에 사용한다 하였지만 대부업에서는 그렇게는 안된다 최소 6개월을 사용해야 한다며 이자도 월 25%라 했습니다. 남편은 저희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천만 원을 빌리게 되었고 제가 보증을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남편은  천만 원을 건네주게 되었고 한 달 후 믿지 못할 정도로 원금과 이자를 주었습니다. 남편은 너무나 황당해하고 정말 그때부터  믿게 되었습니다. 우선 빌린 월세와 조금씩 빌린 이자와 연체금을 갚기 시작했고 그 후부터 남편은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경 남편은 본격으로 함께 사업을 한다며 또다시 대출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또다시 사채를 쓰게 되었고 그때마다 제가 보증을 서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단지 사무실을 운영하고 사업을 안하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무실을 갖고 있냐며 저에게 안심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이번 일만 잘되며 그때 결혼식을 올리자며 저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후 남편은 돈을 건네주었고  더 많은 이자를 주겠다며 저희를 안심시켰습니다. 저희에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건 그리 얼마 못 가서 생기게 되었습니다. 남편 말고 많은 사람들이 저희들처럼 당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무실에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점점 불안해하는 남편은 하던 일도 그만두고 사무실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사기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와 제 남편의 채무로 인해 타인들에게 손실을 입히게 되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 부자를 원한 건 아니었습니다. 단지 조금은 나은 생활을 해 보고자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질 못했습니다. 술에 미쳐 생활을 하였고 건설 현장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능력도 업시 벌어진 일들을 어떻게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고 지금은 단지 아이들만이라도 저희와 같은 생활과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개인회생 신청자격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닌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저희 가족에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밝은세상으로] - 개인파산 하게된 동기가!

 

개인파산 하게된 동기가!

개인파산 하게된 동기가! 개인파산 신청인 0 0 0는 파산신청을 하게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작성 제출하오니 추후 사실 진술서에 관하여 거짓이 발생 할 경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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